정수남 팔순기념 문집에는 단지 정수남 소설가의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삶을 함께 담고 있 습니다. 작가의 자전적 산문, 소설, 시, 회고록, 가족과 지인의 글 등을 통해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사상, 시대적 고민을 드러냅 니다. 이는 문학을 넘어선 인문학적 가치를 지닙니다. 기념문집 은 작가 사후에도 그 사람의 정신과 언어, 작품 세계를 후세에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도서관, 아카이브, 학교 등에 보존되어 연구 자료나 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는 문학적 유산입니다. 따라서 시니어 작가의 일생과 서사가 충분히 담긴 문학 작품집으로 다양한 작품을 탐독할 수 있는 책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Ⅰ차례Ⅰ정수남 선생 팔순기념 헌정문집『서쪽 하늘, 붉은 노을』 문창길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을 펴내며 4 Ⅰ축사Ⅰ 김지연 한국문단의 영원한 버팀목이 되기를 7 손영목 우정의 현장에서 즐겨 마주치며 10 한보영 정수남을 말한다 12 김성달 거랑놈의 세상을 견더 온 작가의 뚝심 14 -정수남 선생의 시간 김영두 늘 오늘처럼 건강하세요 17 Ⅰ1부 정수남Ⅰ 정수남 고맙고 반가운 사람들 26 [시] 정수남 근성 29 정수남 자화상·4 31 정수남 바람 33 정수남 인연 34 정수남 아버지 35 [산문] 정수남 아직 끝나지 않은 짝사랑 37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정수남 내가 늙는다는 것은 50 [평론] 정수남 소설가 오성찬을 말한다 54 [단편소설] 정수남 서쪽 하늘, 붉은 노을 66 정수남 작가연보 86 Ⅰ2부 평론Ⅰ 김옥전 행복이라는 희망은지금 어디 있을까 92 -정수남『시집 병상일기』『너, 지금 어디 있니?』『희망사항』 임철균 정수남 소설「생명의 기원」과 찰스 다윈『종의 기원』에 관한 소고 110 정수남「집」에 나타난 육화된 코기토의 분단극복과 통일 서사 121 Ⅰ3부 시Ⅰ 곽애영 물망초 외 1편 138 김옥전 가면우울증 외 1편 143 문창길 토당리 황 씨·2 외 1편 148 박인숙 목련꽃 차 외 1편 152 백경종 가족사진·1 외 1편 156 신정주 늙는다 설워말고 외 1편 161 이인희 푸른 꽃잎처럼 환하다 외 1편 165 장영호 사라진 나뭇가지 외 1편 170 한경선 초록 용수철 외 1편 174 홍 휴 우리 모두 외 1편 178 Ⅰ4부 수필 및 동화Ⅰ 김정옥 아이는 어른의 스승 외 1편 185 정현경 거짓말 외 1편 193 조수행 봄맞이 외 1편 199 최미경 이제는 없다 외 1편 208 최태랑 봄날이 가고 있다 외 1편 219 한신경 그 소녀는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을까? 외 1편 226 김애련 주차장에 봄꽃이 피었어요! 235 Ⅰ5부 소설Ⅰ 김나영 불을 찾아서 244 김성문 세계를 상실하는 법 268 김성훈 겨울 연어·1 293 김지윤 밥 한 번 먹자 321 미 진 감기 337 박시연 드디어 카톡 358 신 신 어떤 사랑 378 양희순 아픈 손가락 398 이영주 분양 416 이찬옥 유정 문구 430 이창경 그림자놀이 451 임진아 아웃싸이더 473 임철균 코드 블루 코드 블루 490 필자약력 508

아직 끝나지 않은 짝사랑-나의 인생, 나의 문학
정수남

너는 냉정했다. 한 여름철에도 찬바람이 일어날 만큼 차가웠 다. 나이 칠십이 넘도록 너 하나 보고 달려왔으나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았다. 그 하얀 웃음 환하게 보이다가도 어느새 팽, 돌아 서기 일쑤였다. 그래도 한눈팔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 사랑 알아 줄 날이 있으리라, 여기고 미욱스레 달려왔으나 아니었다. 그런 너를 보며 어느 때는 험하고 가파른 이 외길을 왜 뒤도 돌아보 지 않고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후회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네 생각으로 몸이 달아오 르는 나를 발견하곤 쓴웃음을 짓곤 한다. 그렇게 보면 나는 누 가 말한 것처럼 아직 배냇버릇을 버리지 못한 지진아인 게 분 명한 것도 같다.사람들은 흔히 너를 가리켜 미래지향적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나처럼 너를 짝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 것 때문이다. 이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어느 날엔가 는 네가 반드시 자신들의 사랑을 받아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 고 있는 까닭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보면 변화무쌍하 고 신묘불측한 너는 여왕과 같은 존재가 분명하다.내가 너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가을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파란 하늘 아래에서 처음 마 주한 너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도 모르게 평생 사랑하 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빙충맞은 허릅숭이라도 사 랑하는 사람의 모습만큼은 평생 안고 사는 거 아니겠는가. 그 날 나는 난생처음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장원상을 받았다. 부상 이라고 해봤자 겨우 누런 갱지 노트 몇 권이 전부였지만, 백일 장이라는 것조차 몰랐던 나에게 그것은 구름에 오른 것만큼이 나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 담에 큰 작가가 될 것 같다’는 교장 선생님의 격려는 어린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기에 충분했다. 작가…….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 서 하냥 좋아했다.그때부터 내 마음은 너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격적으 로 사랑을 알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라고 해 야 옳을 것이다. 문예반에 들어간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비 오 는 날이면 남산 길을 혼자 올랐고, 밤이면 너를 그리며 몸부림 쳤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맺히도록 연서를 썼다. 읽을 책이 귀하 던 시절이었으나 아버지가 은행지점장인 동무 한주네 집에 가 면 책은 거실 장식장 안에 얼마든지 꽂혀 있었다. 그 시절 충격 을 준 소설은 김동인의 ‘감자’였다. ‘복녀’라는 한 여인의 비극 적 삶과, 가난 때문에 파멸해 가는 그 주변 인물의 추악한 모습 이 아프게 다가와 밤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다음으로 내 혼을 빼앗은 책은 김소월의 시였다. 사랑과 그리움, 그 애절한 이별 노래에 매혹되어 나는 누가 시키지 않 았는데도 공책을 펼쳐놓고 저녁마다 필사하곤 했다. 나중엔 동 무들이 써달라는 연애편지에 외람되이 인용하기도 했지만…….그렇게 사랑하게 된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예총이 주관하는 전 국백일장에 참가하여 입상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발행하던 월 간지 ‘용담’에 연재소설을 쓰기도 하면서 차츰 더욱 깊숙이 사 랑에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 가르침을 받은 강순희 국어 선생님과 매일 시 한 편씩을 써오지 않으면 대나무 자로 손바닥 을 때리던 대구 출신의 장욱제 국어 선생님은 그 일방적인 사랑 에 기름을 부어준 셈이었다.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옴나위없이 짝사랑에 목말라 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며 미친병에 걸렸다고, 손가락질했다. 그들의 말 에 의하면, 그 병은 한 번 걸리면 콧숨 멎는 날까지 고치지 못한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반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를 두둔했다. ‘그 성마른 놈이 기거라두 하갔다는데 와덜 가루 막구 기러네?’
- 중략-
그러나 늦깎이로 문단에 얼굴을 내민 나는 벌거숭이나 다름없 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이미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 동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이호철 선생님과 천승세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또 다른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당시 마포경찰서 앞에 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에서 첫인사를 드린 이호철 선생님은 이북이 고향이라는 동질성으 로, 작고하실 때까지 나를 제자로 걷어주었다. 작가란 펜을 평 생 놓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던 선생님은 실제로 타계하실 때 까지 여든이 넘도록 펜을 놓지 않은 분이었다. 선유리 유리방에 가면 아직도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앉은뱅이책상이 먼지를 뽀얗 게 뒤집어 쓴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천승세 선생님은 작가란 먼저 문학의 혼과 정신을 올곧게 갖춰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이따금 함께 낚시터에 앉기도 했던 선생님은 또 작가란 모름지기 자기 이름 석 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면서 그런 각오도 없이 시류와 야합하여 손가락만 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늘 쓰고 다니는 모자(일명 모택동 모자)는 그때 그 선생님으로부터 하사받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작가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지만, 때 로는 목소리를 함께 하여야 한다는 것도 그때 선생님들과 함께 농성 현장에서 배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에서 많은 문인과 교분을 나누며 조직의 필요성과 목적 등을 배 우게 된 것도 다 선생님들의 덕분이었다. 그것은 결국 뒷날 중 앙문단에서 도외시되고 있는 지방 문인들의 권익을 도모하고, 목소리를 규합하자는 취지로 창립한 고양작가회의의 모태가 되 기도 하였다.그러나 등단했다고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은 아 니었다. 환희의 포옹이 곧바로 이어질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암 세포가 위장에 똬리를 틀고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또 그 와 거의 같은 시기에 천포창이라는 자가면역질환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어느 날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게 된 나는 정 신이 번쩍 들었다. 곧 수술하고, 치료를 시작했다. 90킬로그램 나가던 체중이 55킬로그램으로 줄고, 온몸으로 퍼진 헌데에서 는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의사는 한두 달에 끝날 일이 아니라 고 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나에 게는 네가 있었다. 하나님이 계셨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돌아본 나는 보잘것없는 허접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때까지 게을렀던 내 문학의 혼이 신들 린 듯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구원이었으며, 부 활이었다. 항암제를 먹으며, 스테로이드를 하루에 20알씩 삼키 면서도 나는 컴퓨터를 놓지 않았다. 병상에서 링거를 맞으면서 도 시를 썼다. 목숨이 다해 세상을 떠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했 었다는 근거 하나쯤은 꼭 남기고 싶은 마음이었다.어젯밤 나는 저수지에 앉아 있었다. 밤새껏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찌 불을 바라보며 너를 생각했다. 너는 여전히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너를 만난 게 언제였 는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숙명일지 도 모른다고 자위하며, 그래도 언젠가는 내 사랑을 받아줄 날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너를 찾아 헤매기로 했다. 그렇게 보면 내 짝사랑은 완료형이 되지 못하고 영원히 진행형으로 끝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설혹 그렇더라도 나 는 상관하지 않을 작정이다. 사랑은 결과보다 그 과정이 더 아 름다우니까…….

정수남을 가리켜 흔히들 ‘분단작가’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평世評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그렇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절반의 맞음은 그의 고향이 평양인 해방둥이이고, 그의 소설집들 속에 간혹 「집」같은 묵직한 주제의 소설이 실리기 때문이다. 절반의 틀림은 「생명의 기원」과 같은 작품들이 그의 소설집들 속에 의외로 군데군데 존재하기 때문이다.영국의 생물학자이자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해 새로운 종이 기원한다는 ‘자연선택설’을 발표하며 생물의 진화를 주장하였다.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이론은 이후 집단유전학을 통해 그 과학적 개연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진화이론은 단순히 생물의 진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 사회를 보는 시각에도 적용되었다. 그의 이론은 과학계를 넘어 철학과 종교는 물론 사회·경제·정치·문화 등 전반으로 응용·융합되며 확산되었다. 다윈이 주창한 ‘생명의 기원’ 핵심은 ‘변화와 적응’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다. 다윈보다 이 용어를 먼저 창안하고 사용한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따르면, ‘환경에 적응하는 종(Species)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종은 도태되어 사라지는 현상’이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다. 다시 말해 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적응한 종(適者, the fittest)이 결국 살아남는(生存, Survival) 것을 말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개체의 생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Species)의 생존에서 나아가 해당 종의 생존이 다음 세대로 발전·계승됨을 의미한다. 정수남 소설 「생명의 기원」 스토리이자 주제이기도 하다.이 책에서 정수남은 필자의 주관적 생각을 딱히 적지 않으려 한다. 가능한 소설 원작의 사실적 서술과 설명에 치중하려 한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시작과 전개와 결말 속에서, 정수남의 글을 읽는 독자들과 소설의 ‘내용/의미’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