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떠나도 늦지 않은, 은퇴 후 프랑스 자동차 여행 “날은 더웠고 길눈은 어두웠다. 호텔에서 밥 해먹고 길에서 도시락 까먹고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전찻길로 잘못 진입해 마주 오는 전차와 충돌할 뻔했고, 무심결에 차를 몰고 자전거 도로로 들어갔다. 예약한 숙소에서 문전박대당하고 타야 할 배는 우리 앞에서 끊겼다. 가는 곳마다 휴무에, 황당한 일 투성이였지만, 이상하게 재밌었다. 느리지만 쉬지 않고 달린 49일간의 프랑스 자동차 여행. 아! 또 가고 싶다! 더 늦기 전에!”

프롤로그 ROUTE 1 자연이 빚은 찬란한 풍경 속으로 파리에 도착하다 여행의 시작, 랭스와 스트라스부르 운하 위에서 만난 콜마르 풍경 국경선을 넘어 그린델발트로 호수 연안의 어촌 마을, 스위스 루체른 알프스 산맥을 따라 브리그에서 토리노까지 프랑스 남부의 첫 번째 여행지 니스 영화의 도시 칸 오래된 마을과 호수가 있는 베흐동 세잔의 고향 엑상프로방스 이야기를 품은 항구 도시, 마르세유 고흐의 흔적을 따라 아를 여행 ROUTE 2 시간의 흔적을 따라 걷는 영적 순례 아비뇽 주변의 남프랑스 마을들 프랑스 남부의 가난한 도시 페르피냥 신이 톱질해 만든 안식처, 몬세라토 만레사에서 만난 이냐시오 성인 우에스카 가는 길 치유의 성지 루르드 아픈 역사를 간직한 톨루즈와 알비 꽁끄-로카마두르-파디락 탐험 십자군이 일어난 클레르몽페랑 온천으로 유명한 비시 루아르 고성 탐방 빛의 축제가 한창인 샤르트르 ROUTE 3 빛과 예술의 도시, 파리 근교 산책 한국과 인연이 깊은 파리 외방 전교회 로댕 미술관 산책 오랑주리와 오르세의 풍경 파리 역사 산책 파리 패키지여행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 몽마르트르 언덕과 성심 성당 파리의 마지막 날 에필로그

은퇴 후 여름, 아직 여행 중입니다

여행 루트를 짜는 데만 무려 3개월이 걸렸다.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우리는 몇 가지 포인트를 가지고 움직이기로 했다.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우선은 경이로운 자연 풍광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행 루트에 알프스산과 피레네 산맥을 넣었고,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피르스트 정상까지 곤돌라로 올라가서 바흐알프제까지 걸어 올라가는 코스도 넣었다. 그리고 남프랑스 쪽에 있는,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에 비유되는 베흐동이라는 계곡과 끝도 없이 펼쳐진 라벤더 밭, 파디락의 동굴 체험도 계획해 두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가톨릭 신자이고 또 프랑스가 가톨릭이 왕성하게 성장하고 지속되어 온 나라라서 유서 깊은 성당과 종교 유적지를 방문하기로 했다. 공식 교황청이 로마에서 프랑스로 이전되었던 아비뇽이나 알비 십자군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툴루즈,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파리 외방 전교회 등을 방문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바위섬 위에 세워진 몽생미셸, 바위산 속 1천 미터 고지에 있는 스페인의 몬세라토를 둘러보고, 피레네 산맥 밑자락에 위치한 성모 발현지 루르드도 순례하기로 했다. 단순히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인생에 영적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순례의 의미가 있기를 바랐다.
11p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도중에 점심시간이 되니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고속도로 휴게소 풀밭 탁자에 앉아 제노와 어제 저녁 해둔 도시락을 먹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마른 새우볶음, 마른 멸치볶음, 오징어 조림, 김 그리고 깻잎과 함께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마치 피크닉 나온 현지인들 같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점심을 먹었다. 프랑스는 이렇게 휴게소 풀밭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몇 사람이 자기들이 먹고 남은 음식 쓰레기를 풀밭에 있는 통 속에 넣는 것을 보았다. 나도 식사를 마치고 통 뚜껑을 열고 음식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그대로 투하했다. 마치 현지인이 된 것 같았다.
29-30p

알프스 고갯길에서 갑자기 경찰이 차를 통제했다. 한 시간 동안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찰이 말하길, 오늘이 자전거 경기 대회가 열리는 날인데, 1시간 지나면 이곳을 통과한다는 것이다. 자전거 대회에 참가한 자전거가 다 통과하면 통행할 수 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마냥 기다렸다. 기다리다 지쳐 제노가 지나가는 자전거들을 찍고 오겠다며 아래쪽 도로로 내려갔다. 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유튜브를 시청했다. 지난봄에 티브이조선에서 한 ‘미스트롯’ 경연대회였다. 알프스에서 홍자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말하듯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70p

토리노 성당을 방문하고 난 다음 우리는 이집트 박물관을 관람했다.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집트 유물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리가 방문한 날이 휴관이었다. 우리는 토리노에서 하루밖에 머물지 않을 생각이었다. 박물관을 보려면 내일 오전에 다시 와야 하는데, 박물관 개장 시간과 호텔 체크아웃 시간을 계산해보고, 또 멀리 모나코를 들러 프랑스 니스까지 들어가는 시간을 고려해보니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이집트 박물관 문 앞에서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부지기수였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길을 잃거나 고생고생해서 찾아갔더니 휴관이라거나. 초행길에 계속 헤맸는데 알고 보니 목적지가 바로 옆일 때도 있었다.
76-77p

늦게 호텔로 들어왔다. 축제 전야의 비공식 행사에서 울려오는 함성들이 귓전에 윙윙거렸다. 호텔에 차를 주차했는데, 여름 꽃나무 넝쿨 아래였다. 헤드라이트를 켜 두니 분홍색 꽃들이 활짝 피어 있어서 분위기가 화사해 보였다. 호텔로 들어와 제노와 잠깐 로비 의자에 앉았다. 의자 뒤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이 18세기나 19세기쯤의 것으로 보였다. 어느 건물 앞에 마차가 정차해 있고 그 뒤 쭉 뻗은 도로 사이로 플라타너스가 숲을 이루고 있는 그림이었다. 정신없이 돌아다닌 다음 벤치에 앉아 여유롭고 편안하게 하루를 마감했다.
157p

우리가 베흐동 계곡에 머물 때 콘도식 숙소의 기억이 참 좋아서 직접 밥을 해먹을 수 있는 숙소를 골랐다.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 3시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도 숙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절대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골목을 헤매다가 목적지에 다 왔는데도 호텔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웬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찾는 숙소 이름을 말했더니 그가 왜 전화를 안 하느냐고 밑도 끝도 없이 다그쳤다. 그래서 내가 왜 전화를 해야 하느냐고, 당신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했더니, 자기가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는 확인해보라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가 무슨 정보라도 줄 줄 알고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들어간 집 대문을 두드려도 보고, 벨도 눌러보았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정말 황당했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에 있는 메일 웹을 열어 보았다. 그 사람이 2시간 전에 나에게 보낸 이메일이 있었다. 문 여는 법과 내가 묵을 숙소의 호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159p

내비게이터가 가르쳐 준 길은 지금까지 지나온 길보다 좁은 시골길이었다. 한 20분쯤 갔는데 길이 더 좁아졌다. 점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좁은 비포장도로, 교차할 수도 없이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나가는 길로 진입하게 되었다. 잠시 차를 멈췄다. 이 길로 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잘못 들어온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우리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비게이터는 그냥 직진하라고 한다. 이미 좁은 길로 들어선 지 1시간 정도 지났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니 개천이 나왔다. 개천에는 물이 넘칠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면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차 한 대만 가까스로 지날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제노는 건너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저 다리를 꼭 건너야 하는지 다른 길은 없는지 내게 물었다. 다리가 너무 허술하여 무너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과연, 다리 밑으로 강물이 거세게 몰아치며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나니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시간은 벌써 오후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큰일이다. 산속에서 이 좁은 도로를 계속 통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길은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내 차는 푸조인데 차에 해발 고도가 표시된다. 현재 해발 800미터를 표시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높이 올라가더니 드디어 해발 1000미터를 넘어서고야 말았다.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인공 구조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89-190p

49일간의 대장정 중에 생각나는 건 너무 더웠다는 것, 그래서 사실 힘들었다는 것.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었는데 더위가 우리의 행적과 행로를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땀을 많이 흘린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비 오듯 흘렸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예년보다 평균 기온이 10~17도 더 높았다고 한다.
체력적 소모도 대단히 컸다. 칠순을 2년 앞두고 나이에 맞지 않게 고된 행군을 한 듯하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귀국 후 두어 달 동안 꼼짝 못 하고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다. 기력이 쇠해서 어디 움직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 와중에 제노는 대상포진까지 걸려서 그해 10월까지 무척 힘들어 했다.
그런데 몸이 점차 회복되자 이상하게 다시 한번 더 이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2020년 1월부터 불어닥친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장기간의 해외 여행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 코로나가 종식되기는 했지만 그때처럼 자유롭게 자동차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 자동차 여행이 더 소중했고 정말 잘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335p

사실 여행 자체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서로 공유하고 공감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를 의무적으로 했다. 물론 프랑스 여행의 태반은 성당을 방문하는 것이고, 방문할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실어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기도 했다. 이렇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여행하면서 누적된 피로와 불편했던 감정들이 녹아내리고 소멸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제노는 우리의 여정을 한마디로 하면 ‘기도’의 과정이었다고 정의 내렸다.
338p

자연이 빚은 찬란한 풍경 속으로 시간의 흔적을 따라 떠난 49일간의 여정 이 책은 여행 전문가가 쓴 안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성 가득한 에세이스트의 문장으로 빚어낸 감동적인 산문도 아니다. 논문과 보고서에 묻혀 평생을 살아온 한 연구원이, 은퇴 후 아내와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떠난, 49일간의 자동차 여행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매력적이다. 사실 49일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오히려 예기치 못한 변수들과 끊임없이 마주해야 했다. 날씨는 무더웠고, 길눈은 어두웠다. 고속도로에선 법규 위반으로 딱지를 떼었고, 호텔을 찾아가다 해가 저문 산속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축제의 도시에선 정작 축제를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고, 기대했던 박물관과 미술관, 성당은 하필 문이 닫힌 날 도착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도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때로는 호텔 주인에게 냉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와 작디작은 불운들 속에서도, 여행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었다. 어릴 적 동경했던 알프스를 직접 자동차로 넘으며 눈부신 풍경을 눈에 담았고,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산 바흐알프제 호숫가에서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는 소소한 호사를 누렸다. 남프랑스를 달리며 끝도 없이 펼쳐진 라벤더 향기에 취했고, 몬세라토와 루르드 성지를 순례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은, 49일간 부부가 함께 길 위에서 보낸 시간 자체였다. 매일 아침과 저녁, 소박한 기도를 함께 올리며 믿음과 신뢰가 서로를 끝까지 지켜줄 것임을 확인했다. 말하자면 이 기록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삶을 다시 바라보고 다듬어가는 전환점이자 성찰의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에서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는 것, 인생은 그 자체로 끝없는 여정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