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숙 시인의 이번 작품집에는 사이가 갖는 의미를 다양한 표현으로 독자들이 지닌 각기 다른 성향에 쉽게 스며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쉽다는 표현은 시가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인의 생각이 적절한 묘사를 얻어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음을 뜻한다. 박혜숙 시인의 작품은 우리들의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허상들에 대한 접근이기보다는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나 친한 친구들 또는 손자와 손녀들의 모습을 쉬운 언어로 담아내기에 누구에게나 공감을 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 시집이 안고 있는 ‘사이의 미학’이라고 볼 수 있다. 박혜숙 시인의 작품에는 다양한 일상들이 나타난다. 그 일상들은 지극히 사실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어 가공되지 않은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다. 박혜숙 시인의 일상이 지닌 특징은 다양한 일상이 다른 일상을 만나 깊이를 더하는 모습에서 삶에 기대지 않고도 일상의 모습만으로 삶이 가진 의미의 깊이에 따른 효과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워낙 다양한 일상과 일상이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두 일상 사이에 생성되는 의미를 덧대면서 생활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북항 안개에 대교가 사라진다 바람이 길을 열면 거친 기호 가득한 떨림을 지운다 신선대도 조도도 안개는 독백 중이다ㆍ125 어느 손가락 끝에 있는지 유리창에 납작 엎드린 포말들 달릴수록 하얗게 부서진다 신선대 터미널 트렌스퍼 크레인 기지개 켜며 아침을 부른다 바다와 어깨동무하고 다가온 안개는 자리를 차지하고 옷을 벗지 않으려 한다 대교 위로 흘러가며 스며드는 침묵들 페달을 깊게 밟는다 희미한 미로를 가르며 붙잡을 수 없이 흩어지는 시간 속 낯을 가리고 뒷모습 보인 봉래산도 있다 신선 터널을 빠져나오자 저만치 장산봉 이마가 말갛게 단장을 하고 손짓한다 경계는 이미 없다고 안개는 독백 중이다 -「안개는 독백 중이다」 전문 안개가 피어오른다. 바쁘게 움직이는 아침 출근길 안개가 바다에서 올라와 도시를 삼킨다. 이동 시점에 따라 전개되는 안개의 포식을 화자는 순서대로 천착한다. 시선은 북항대교를 향한다. 화자가 가고 있는 길에 놓인 대교이다. 바람이 안개를 잠시 걷어 길을 열면 부산항 거친 기호 가득한 떨림이 보이고 안개는 그것을 지운다. 앞에 보이는 신신대를 향해 가는데 오른쪽으로 보이던 영도 쪽 섬인 조도도 손가락으로 가르킬 수가 없이 지워진다. 안개는 유리창에 붙어 납작 엎드린 물방울이 되고 그것들은 달릴수록 하얗게 부서져 흩어진다. 신선대 부두 크레인이 기지개를 켜면서 안개 위로 몸을 솟구친다. 안개는 물러나려 하지 않는다. 다리 위로 흘러가면서 침묵을 무겁게 깔아 놓는다. 차의 속도를 높일수록 안개는 미로를 만든다. 붙들 수 없이 흩어지는 시간 속에는 뒷모습 보인 봉래산이 있고 신선 터널을 빠져나온 시야에는 장산이 말갛게 단장을 하고 있다. 이제 안개는 보이지 않는다. 터널은 경계를 이룬다. 경계를 넘어선 곳에 안개는 사라지고 없다. 안개는 경계 이전에 먼저 나를 가두고 있었다. 경계를 지나온 다음 안개가 사라졌다. 안개가 하는 독백은 경계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시적 화자가 안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박혜숙 시인이 이 작품에서 하고 싶은 말은 경계란 의미가 없다는 엄숙한 선언이다. 나와 사물 사이 터널 이전의 풍경과 터널 이후의 풍경은 결국 하나의 북항에 존재한다. 작은 터널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안개로 가리워져 있던 세상이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 주고 있다. 안개가 그 경계를 지운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박혜숙 시인은 이 작품에서 나와 안개 사이에 벌어지는 여러 상황들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 채 안개의 처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안개는 경계를 지우는 존재로 남는다. 그 의미를 안개는 현실 모습을 독백으로 풀어내고 있다. 일상의 관계 속에서 시인이 찾아낸 나와 안개 사이 혹은 대교와 안개 사이, 안개와 크레인 철탑 사이를 경계가 지워진 세계임을 말하고 있다. 박혜숙 시인은 사이에서 따뜻함을 발견하고 존재의 의미를 보여 주는 일로 새로운 관계 혹은 사이를 발견한다.

목차…4 자서…3 제 1 부 나비 날갯짓…11 테트라포드에 빠지다…12 안개를 벗다…14 보또랑 물을 품다…15 오솔길에 들다…16 비상구…18 을숙도에서…20 다대포 안개…21 두레박 나무…22 꽃잎이 전하는 말…23 뻐꾸기 둥지…24 집요한 셈법…26 찔레순이 돋아 난다…28 백두산 폭발…30 늙은 호박…32 푸른 장미…33 노을 전망대 서가에 서다…34 급체…36 제 2 부 새날 변곡점…39 소나기…40 지난 시간을 털다가…42 말랑한 뒷모습…43 분홍 낮달마중…44 젖은 목요일을 말리다…45 황톳빛 물결…46 을숙도 노을…47 너에게 물들다…48 첫눈…49 겨울 여행…50 보름달…51 팥빙수 '억'…52 장미꽃길에 기댄 오후…53 광복로 빛 축제…54 안개를 벗다…56 뿌리에게…57 여름 또 여름이 되면…58 국화 전시회…60 제 3 부 만인산에서…63 천문동 공중정원에 들다…64 석모도 마애불…66 천지…67 섬, 밥상이 쉼표…68 고흐 속에서…70 수국 길…71 천지에 들다…72 화개장터…73 이팝꽃에 기댄 오후…74 앵무새를 위하여…75 정승골 아침…76 그림 물방울…78 광화문광장에서…80 모래 썰매…81 동백꽃 주파수…82 수석 탐석…83 백남준 숲…84 제 4 부 하늘 줍는 할머니…87 혼자 일어나는 밥알…90 해를 따라가다…88 딸꾹질…91 구두 한 짝…92 안개는 독백 중이다…93 재개발…94 묵언…96 반야용선 타고 떠나다…98 구두를 버리다…100 고무나무에 쓰다…102 멀거나 가깝거나…104 삼킨말 토하다…106 관념을 자르다…107 고운 날…108 달의 뒷면…109 귀가…110 나무를 심다…111 파도타기 응원…112 ? 해설/일상 관계에서 사이의 발견-강영환…113

나비 날갯짓


나비가 난다 오른쪽으로 날던 바람이 몸을 돌려 왼쪽 귀가 찢어진다 신발 바꾸어 신은 제주 할망 춤사위다 할망은 왼쪽을 나는 나비다 나비길이 함께 춤추는 바다, 눈은 지금 운진항에 있다
가파도 향하던 발길이 폭풍과 줄다리기다 발버둥 쳐도 흔들리는 육신 우산은 이미 손을 떠났다 태풍의 손에 든 항구 빠져드는 늪에서 더 옭아매는 파편 속 얼굴을 후려치고 달아나는 바람, 할망은 기억 따라 운진항을 떠돌다 치매 속에서 두 팔 벌려 흔들리는 차창에다 손을 뻗는다
블랙홀에 빠진 할망을 삼킨 폭풍우 까맣다가 하얘진 태풍의 눈에 누웠다 ‘송다’ 발자국 찍힌 유리 파편 무색 춤사위에 깃발을 흔든다 폭풍우가 지나고 젖은 바닥에서 곡선을 그리는 나비 한 마리 제주섬은 다시 그녀 안에 산다


테트라포드에 빠지다


제방에 누운 신호공단 끝자락 바닷가
낚아챌지도 모르는 바람 속
'파도야 어쩌란 말인가’
온몸으로 파도를 기다리는 여자에게
폭풍 너울이 그녀를 덮친다
그 여자 테트라포드 속으로
파도를 안고 떨어진다
그녀는 폭풍의 눈이다
물꽃 속 사계절이 함께 흘러간다
그녀는 여왕이다
부르는 대로 도열한 남자들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대로 그녀는 신났다
용궁 속에 놀던 한때도 식상한지
잠꼬대 가속에 하품하다 혀를 문다
지나가던 소독차가 놀라 달린다
그 여자 눈에서 허물이 하나씩 빠진다
뼈마디마다 빠져 나간다 바닷가 끝으로
누워 있던 그 여자
테트라포드 밀고 버스를 탄다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다
아무 일도 없다


안개를 벗다


묵상 너머 묵상이다
아침마다 짙게 내리는 안개를 입고
얼굴 내미는 낙동강을 본다
치맛자락 날리며 강변로를 달린다
날개 펼친 콘도르가 술래잡기하자
안개 흩어지며 건물 뒤로 사라진다
어둡다 바람이 분다
출발선에서 뜀뛰기 하는 무리
떠나지 않으려는 한 무리
입었던 옷을 벗지 않으려 한다
붉게 다가서는 여명이 흔들린다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 너는
꿈속에서 여태 서성인다
주인공이 된 짧은 시간이 걷히고
너를 데리러 온 태양은
강변로 넓은 길에 서서 어둠을 거둔다
고요하게 숨 쉬다 한 겹씩 벗고
가벼워지는 너, 추워 보인다


보또랑 물을 품다


모내기한 후 보름 무렵 학교 파하면 논에 물 당번이다
논물로 사이 좋았던 엄마와 이웃 동네 경수네 아버지가
큰소리로 다투고 난 후, 사촌 언니와 함께 물길 지킴이
로 보또랑으로 간다 우리 논 아래 큰집 논이라 물꼬를
뺏기지 않고 큰집 논까지 가득 담고 나면 물길을 내어
준다
보또랑은 우리 동네 보배다 물대기를 마친 여름이 다
가오면 중간중간 둠벙가에 오디가 영글고 그 아래 둠벙
마다 여자 남자 멱을 감다 뽕나무에 올라 오디를 따 먹
는다 보랏빛 변한 입술에 오디 물이 들면 서로 보며 웃
는다
비가 많이 오고 난 후 저수지에서 내려온 물로 보또랑
은 물 반, 고기 반이 된다 큰 고기는 동네 어른들 웃음
이 잡고 작은 고기는 아이들 신발 차지다 멀어져 간 시
간이 지나고 장미 둑길 고향 개울 물소리가 내 귀에 젖
어 든다 홀랑 벗고 뛰놀던 머스마 가스나 새까맣게 타
버린 얼굴, 반짝이는 눈동자 물비늘에 눈이 부신 날이
또 내 품에 온다 품속 가득 보또랑 물을 안는다


오솔길에 들다


컴퓨터 켜니
오솔길이 푸른 얼굴로 다가온다
오후 두 시가
모니터 숲으로 들어간다
숨길 거친 유리창에
새 한 마리 넋 놓고 있다
날개 둘 곳 찾았다는 듯
열린 창으로 들어온다
모니터와 유리창 사이에 내가 있다
나도 오솔길을 걷는다
눈이 맑아지니 시계는 시각을 잊었다
침묵을 깨뜨리는 후투티
오솔길 누비며 온 숲을 휘젓는다
물관에 숨은 사월 연두가 전염된다
나도 한 그루 나무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여름이 가을로 가고 있다
내 날개도 숲을 지나
오솔길에 핀 들국화 향기 따라
16ㆍ박혜숙 시집
내 안에 와 함께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길


비상구


발버둥 치는 바람 꼬리가 낯설다
바람이 냇가를 뒤엎자
송사리 솟구치다 떨어지듯
얼굴에 풀이 죽어 누렇다
“미경아 왜 그래”
“십오 년 같이 살던 ‘별’이 죽었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며
물에 빠진 웃음으로
실밥처럼 흔들리며 웃는다
“언니 살아갈 힘이 없어”
시장통 옷가게 문 걸어 잠근 지 보름
“엄마 가신 것도 아닌데 개꿈 잊고 힘내라”
엄마 때보다 더 아프다며
혼자 중얼거리는 나무 막대기
출구는 어딘가 있기 마련이야
문 열고 빨리 나오렴


을숙도에서


공항 오르내리는 은빛 날개 새처럼
잔디 위에서 날개 펴고
봄을 안고 하강하는 여자
휘날리던 벚꽃이 되어 누워 있다
생태공원 초록빛 도화지에
흔적 따라온 휘파람새도
나뭇가지에 앉아
그녀 궁금증에 꿈쩍도 않는다
지상에 내린 새가
공원 몸속 깊은 곳에서
하늘바라기로 봄잠에 들자
초록 날개 편 큰 새
을숙도 하늘을 높이 난다

박혜숙 시인의 작품에는 다양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이 장소들은 여행에서 만난 낯선 곳일 수 있다. 단순한 여행으로 끝나지 않고 사이가 갖는 의미를 찾는 모습들이 내재한다. 이런 다양한 여행의 모습에서 자아를 인식하고자 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음도 단순한 즐거움에 빠지지 않으려는 시 정신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봄이 노래 부르며 간다 이팝꽃 드리워진 차창 가에 봄 밥상이 문을 민다 안개는 독백 중이다ㆍ119 봄이니까 입이 다물어지지 않으니 봄날은 연이어 가는 나비이고 창밖 가로수로 발음 서툰 절창이 몰려든다 위양못 가는 길은 차들로 물결이다 입구는 목이 길어진다 코앞이 위양못이다 사람도 걷고 차는 기어가고 넋 나간 얼굴들 봄빛을 지운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온다 차창에 빗금 친 빗방울 폭우로 쏟아진다 비 내리는 오후가 뒷걸음친다 붉은 봄날도 하얗게 지나갔다고 함께 간 숙모 주름 이마 들추며 숨결 내뱉는다 비 밭에 논두렁 밭두렁 비안개 흩날리는 추억들을 되뇌며 익명으로 찾아든 슬픈 가락, 바퀴도 없이 구른다 비에 젖은 울음을 묻어두고 돌아간다 다음 해 꽃을 기약하나 흘러갈 뿐이다 -「이팝꽃에 기댄 오후」 전문 위 시에는 위양못이라는 장소가 등장한다. 위양못은 못 둘레에 숲이 이뤄져 있고 못 가운데 떠 있는 섬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커다란 이팝나무가 서 있어 화려한 꽃이 만발하는 밀양 퇴로리에 있는 작은 못이다. 화자는 그곳에 달려간다. 이팝나무꽃을 보기 위해서다. 꽃구경 가는 마음은 들뜨게 마련이다. 그것이 잘 표현된 첫 행이다, 위양못 가는 길 가로수는 이팝나무이다. 가는 차창에도 이팝꽃이 피어 밥상을 차린다. 이팝꽃은 쌀밥을 지칭하는 이밥과 어감이 비슷해서 쌀밥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봄 4월은 우리 민족에게는 춘궁기라 해서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했다. 이 시는 그런 의미를 배경으로 깔고 있어 꽃구경 속에는 아픔과 눈물이 함께 배여 있다. 이런 이중성이 시가 지닌 상징성이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화자의 입술이 닫혀지지 않음은 감탄과 경탄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 화자는 가는 길에 만난 이팝나무 가로수에 이미 절창을 빼앗겨 버린 혼미한 상태임을 고백한다. 가는 길은 차들이 막혀 코앞이 위양못인데도 차는 기어가고 사람은 걸어가고 걷는 걸음이 더 빨리 가고 짜증 담은 얼굴들이 봄빛을 잃는다. 구름이 몰려와 빗방울이 차 유리에 빗금을 긋더니 이내 폭우로 변하여 오후 시간이 뒷걸음친다. 함께 간 숙모의 이마에 진 주름이 붉은 봄날이 하얗게 지나갔다고 한숨을 내뱉는다. 비 밭에 논두렁 밭두렁이 비안개 흩날리는 추억을 되뇌이고 익명의 누군가가 부르는 슬픈 노래는 바퀴도 없이 구른다. 익명의 누군가는 위양못을 쌓던 농부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춘궁기에 배를 곯았던 조상들일 수도 있겠다. 다양한 추측을 부르게하는 익명은 비에 젖은 슬픔을 묻어두게 한다. 그리고는 다음 해에 올 이팝꽃을 기억하며 돌아서게 만든다. 풍경 속에서도 그 풍경에 깃든 의미의 존재들을 찾아내는 모습이 사물을 대하는 깊이 있는 사고를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