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의 설형문자가 처음 나타난 기원전 3200년 이후 인류는 다양한 문자체계를 고안해 냈다. 세계의 문자학자들은 문자의 장구한 역사에서 알파벳은 단 한번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저하지 않고 동의한다. 그렇다면 가장 위대한 소리글자로 알려진 훈민정음은 창조된 글자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훈민정음의 창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온 편향되고 국수주의적인 교육과 달리 훈민정음의 원리와 기본자(ㄱㄴㅁㅅㅇㆍㅡㅣ)는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흔히 모든 창작이 그러하듯이 훈민정음은 기존 창작물(실담문자를 포함한 인도문자와 위구르문자/몽고문자/파스파문자)의 변용과 조합의 산물이다. 볼테르가 익살스럽게 ‘독창성은 출처를 숨기는 기술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훈민정음의 원리와 기본자의 출처는 철저히 숨겨져 왔기에 훈민정음은 100% 순도를 자랑하는 순수 창작물로 여겨졌다.하지만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표절과 창작은 같은 말이다. 티 안나는 표절이 창작이다. 아마도 한글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신일지라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표절할 수 없었기에, 신은 우주를 표절하지 못했고 대신 창조했던 것이다. 인류가 만든 최초의 알파벳은 비록 자음문자이긴 하지만, 이집트 홑_글자 (uniliterals)이다. 이집트의 성각문자 가운데 홑-글자라고 불리는 24개의 표음문자가 있었다. 이집트인은 자음자인 홑-글자로 음절을 표기했다. 최초의 자음문자인 이집트 홑-글자는 표의문자의 발음, 낱말의 어미-어형변화, 차용어, 외국인 이름, 외산품의 명칭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24개의 홑-글자로 이집트어의 모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었지만 이집트의 지배층은, 조선의 지배층이 훈민정음을 무관심으로 방기했듯이, 최초의 표음문자를 무시할 뿐,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거나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홑_글자는 시나이반도의 터키옥 광산에서 일하던 셈족 노동자의 손에 의해 원시시나이문자로 다시 태어났고 원시시나이문자는 페니키아인의 손을 거치며 페니키아문자가 되었다. 이후 페니키아 문자는 이 세상 모든 알파벳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문자의 최초 탄생에서부터 훈민정음의 창제까지 극적인 문자의 진화과정을 증거에 입각해 기술하고 있으며 책의 후반부에서는, 한글 활자와 폰트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새로운 글자체(조이체)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책 전반에 걸쳐 후추와 소금처럼 뿌려 놓은, 책의 본문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 책의 풍미를 더하고 있다. 상식이 곁들여진 지식에서 오는 깨달음은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는 독자들이 노여움을 잠시 유보하고 지금과는 다른 시각에서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음미하길 바랄 뿐이다. 연약한 아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아기 새의 세계를 제한하고 있는 알을 깨뜨려야 아기 새는 더 넓고 더 자유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깨트릴 수 있다. 그리고 깨트려야 한다.

1 문자의 분류 2 문자의 제작 원리 3 훈민정음 4 한글 기계화와 부조화 5 모양과 기능 6 동양인은 왜 암기위주의 교육 문화를 갖게 되었나 7 한글 음소(문자소)활자 제작 8 세종체와 완벽체 9 완벽체의 용도 10 완벽체가 일찍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면? 11 완벽체 읽기 연습 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