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리지 않는 거울, 열고 싶은 그림자 2022년 《시학과 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김무현 시인의 첫 시집 『달의 방정식』이 문학의전당 시인선 406으로 출간되었다. 어느덧 일흔일곱, 77세에 첫 시집을 출간하다니! 이거야말로 진짜 노익장 아닌가.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인 김무현 시인에게 이 시집은 시인으로서의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달의 방정식’이라는 시집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인생을 제법 살아본 자의 지혜가 담겨 있을 것 같다. 이런 뉘앙스 자체가 시적 변별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삶은 고통스럽고 슬픈 것과 맞서거나 껴안는 것이라고 김무현 시인은 시로서 보여준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이 시집 속에 직접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이 독자의 의무가 될 것이다.

제1부 풍화의 틈 13/발목의 길이 14/그림자 입술 16/멀수록 덜 아프다 18/발끝 그림자 19/해 질 녘 강가에서 20/바퀴를 굴리고 싶은 22/서강에 날다 24/소리 잃은 사람들 25/허물 벗기 26/갈증 28/기생초(妓生草) 29/꽃의 항변 30/꼭짓점 32 제2부 박제된 허상 35/속울음 36/바람이 머문 자리 38/부러진 기역자 39/버스를 기다리며 40/새벽 42/안개 속의 말들 43/여섯 달 44/인드라망 46/남겨진 것들 48/유혈목이가 있는 오후 49/틈 50/후반전 52/하직(下直) 54 제3부 우리가 젖던 시간 57/가늠자 속 눈빛 58/방문 닫아걸고 60/혈점(血點) 61/달의 방정식 62/두 달의 단풍 64/눈길 65/갈대 66/초롱 하나 띄우고 68/누이의 강 70/파랑새 71/코고무신 72/신암동 1186번지 74/하늘처럼 바람처럼 76 제4부 구멍 난 女子 79/똥꽃 1 80/똥꽃 2 82/똥꽃 3 84/소복(素服) 85/노트 위의 변비 86/녹슨 시계 88/귀가 막히다 90/같은 문장 다른 해석 92/늙은 전화기 93/갓길의 신발 94/달의 춤 96/버려진 신발 98/오지 않을 편지 100 해설 이위발(시인) 101

시간을 저울에 올려본 적 있는가
어깨 위엔 저녁이 얹혀 있다
꽃은 시들고 바람은 길을 잃는다
남는 건 희미한 흔적뿐

별은 왜 먼 곳에서만 빛나는 걸까
닿을 수 없음은 시간처럼 서럽고
위안은 기억처럼 내일이 오늘 위에 포개지고

남은 반쪽은 그림자를 닮겠지
빛을 입으려 구름은 자리를 떠나지 않는데
하루의 등을 밀며 서 있다

강 위를 흐르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헝클어진 그림자 하나쯤 웅크리고 있겠지
바람이 저녁을 흔들고 낡은 시간을 털어낼 때
남은 건 풍화의 흔적뿐
- 「풍화의 틈」 전문


나는 뿌리의 맥박에 기대어
조용히 숨 쉬는 고요한 심장
연분홍 웃음도 핏빛 울음도
저무는 날의 외로움도
너희 눈이 만든 허상일 뿐

나는 아파한 적 없고
슬픔에 젖은 적 없으니
바람의 길에 눕고 일어서며
비가 오면 비에 젖고
햇살에 내 빛을 드러낼 뿐

달빛에 밤의 티끌을 씻고
이슬로 얼굴 닦으며
고요한 운명처럼
씨앗을 틔우고 꽃대를 세운다

한 계절 머무는 삶의 숨결인데
울지도, 웃지도, 노래도, 절규도 못 하는
흙과 하늘 사이
찰나의 빛으로 지고 피고
다시 태어날 뿐

호들갑 떨지 마라
눈물과 환희에 불러들이지 마라
너희들의 거울이 아니다
내 몫의 생을 다하는
하나의 꽃이다
- 「꽃의 항변」 전문


호흡이 어긋난다, 파란 안구가 나를 겨눌 때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흔들리는 시선
억지로 지은 웃음
낯선 얼굴의 가면이 되고

찰칵, 셔터가 닫히기 전의 길고 긴 순간
초조와 불안이 휘감고 침묵은 존재를 억누를 때
찰칵, 가장 짧은 거리가 죽음보다 길다

나는 나를 삼키고 빛의 감옥에 갇힌
감정을 잃은 박제 하나
투명해지길 원했지만 순간의 빛 속에 박혀 있는

나는 피사체가 아니다 낯선 기억에 갇히는 일
살아 있는 내가 죽은 사본이 되는 일
묻는다, 마음에만 머무는 허상인가
- 「박제된 허상」 전문


잠든 밤이 하얗게 누워
개 짖는 소리 지워진 아득한 설원의 끝
마지막 불빛마저 꺼져 투명한 무음의 공간

두 점으로 서서 차가운 달빛 아래
날 밝기 전 떠난다는 너의 눈빛에 젖어
왜냐고 묻지 않았다

서로를 읽으려고 굳어버린 시간을 붙잡고
풀리지 않는 다른 방정식으로 마주 선
출구 없는 빙벽 앞

두 다리는 허공을 헛디디고
비틀대는 내 몸을 따라 흔들리는 달빛 물결
손을 뻗어 잡아 보았지만
그늘만 손가락 사이에 빠져나갔다

눈 쌓인 벌판은 빛났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고

먼동이 오기 전
끝맺지 못한 이별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
너는 별빛으로 부서지고
나는 부신 달빛에 눈을 감는다
- 「달의 방정식」 전문


걸어온 길 깊고 어두워 말을 지워버린 女子, 가늘고 질긴 아픔이 시작된 곳이 청량산이라 했던 女子, 안개 자락을 안은 女子, 첫사랑 사내 집으로 인사 갔던 날, 밤비 속에 쫓겨난 맨발의 열아홉 女子, 눈물 켜 들고 돌아온 시오리 길, 아픔을 도려내자고 낯선 남자에게 주저 없이 시집간 女子, 뒤풀이 끝나자마자 뜬금없이 날아든 주먹, 구둣발에 짓이겨져 두 팔로 허공을 휘어잡고 쓰러진 女子, 귓속에 갇힌 비명처럼 정신줄 놓았다가 핏물 속에서 눈을 뜬 女子, 출근했던 사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쉰 女子, 삶에 뜯기고 지쳐 겹겹이 쌓아 올린 침묵에 잠들었던 女子, 여남동 앞바다 돌밭에 앉아 구멍 숭숭 난 돌멩이 하나 쥐고 펑펑 울었다는 女子, “니가 나구나”, 그제야 말문이 터진 女子, 女子는 수평선에 젖고 노을은 女子에 젖고,
- 「구멍 난 女子」 전문

시는 고통스럽고 슬픈 것이다. 시는 절박함이다. 맞서거나 껴안는 것이다. 삶이 고통스러우니 시가 아픈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고통스럽지 않게 쓰려고 발버둥 친다. 그 이유는 입체감을 만들기 위해서다. 대상의 입체감은 그림자가 만든다. 그림자는 시선을 모방하거나 과장하기도 한다. 다른 대상을 불러들여 은근슬쩍 감추면서 아닌 척하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고자 하는 의도와 말하고 있는 언어 사이의 거리가 시의 긴장감을 만든다. 달의 실눈 밑으로 꿈결의 개미 한 마리 불러들여 빈 페이지에 뱉어내지 못한 고난의 무게를 작은 등에 얹어 놓고 처진 시간의 주름 따라 비틀거리는 단어들 불빛 속에 감겨들며 잠의 그림자가 걸어오는데 개미 한 마리 난해한 문장 안으로 잉크 줄 따라 기어가고 허리 꺾인 낱말들이 길을 잃고 알람에 놀란 새벽 진땀 배인 등을 화들짝 떼어낼 때 밤을 지우지 못한 커튼 사이 늘어진 자동차 미등이 길이를 이기지 못하고 덜 깬 눈으로 뿌연 머릿속을 더듬을 때 먹물처럼 굳어진 개미의 기억 제자리를 잃은 글자들 먼지처럼 흩어지고 토해내지 못한 시어들 머릿속 숨 막히는 변비를 앓고 밑줄 친 텅 빈 사막 위 개미 한 마리 연필을 베고 누워버렸다 - 「노트 위의 변비」 전문 시를 불러오는 두 개의 문이 있다면 「노트 위의 변비」는 아픔과 고통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딴짓을 부리듯 하고 있다. 노트 위에 개미 한 마리를 불러들여 놀이하듯 한다. 그 놀이를 보면 노는 게 아니라 개미는 “고난의 무게를/작은 등에 얹어 놓고” 행군을 하는 듯하다. “난해한 문장 안으로/잉크 줄 따라 기어가”며 먹물처럼 굳어진 개미는 “텅 빈 사막 위”에 “연필을 베고 누워버”린다. 인용 시에서 김무현 시인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개미를 통한 아이러니다. 종이 위에 써 내려간 글자처럼 기어가는 개미는 시어와 함께 동일시된다. 시원하게 시어를 배설하지 못하고 변비에 걸린 듯 끙끙 앓고 있는 시인의 고통과 아픔이 개미의 일생과 닮았다. - 이위발(시인)